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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회가 생겨서 큰 회사에 이력서를 한 번 내보게 되었다. 나의 지금 경력으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건 솔직히 욕심이다. 그래도 큰 회사에 들어가서 하게 될 일을 상상해보고, 거기에 맞춰서 내가 여태 해왔던 일들이나 내가 할 줄 아는 것들을 정리해보는 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이력서를 써보면서 새삼 깨달은 게 있다. 내가 지금까지 이력서를 한 번도 제대로 써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이런 기회 하나 하나가 소중하다. 언젠가 이력서를 많이 써야 할 때가 올 텐데, 지금처럼 긴장해서 각 잡고 잘 정리해두면 두고두고 쓰일 데가 있지 않을까 한다.

 

이력서라는 걸 써본 적이 없으니, 일단은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일들을 주욱 늘어놓아 보았다. 생각보다 적을 게 많아서 놀랐다. 늘어져 있는 것들을 보면서 뿌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 의미 없는 글자들이 늘어져 있는 것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몇몇 부분은 숫자로 나타내기도 했다. 무슨 일을 몇 번 했고, 그 덕분에 매출이 얼마나 났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랬더니 처음보다는 더 그럴싸해 보였다. 여기까지 해서 자랑스럽게 주변 사람 몇몇에게 보여주었다. 대체로 괜찮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런데 몇몇 분들은 이게 무슨 이력서냐고, 뽑는 사람이 궁금해할 만한 내용을 적는 게 맞지 않겠냐며 뼈 때리는 말씀을 해주셨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 말씀을 다시 곱씹어보았다. 내가 자랑스럽게 써놓은 것들은 다 내가 나를 자랑하고 싶어서 써놓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정작 내 이력서를 받아볼 누군가는 이런 내용들에 별로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그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에 내가 합류했을 때 곧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는지, 경력직답게 빠르게 실적을 낼 수 있는지, 나아가서 자신의 가치나 비전을 공유하면서 함께 지치지 않고 오래 일할 수 있는지 같은 것들이 궁금할 것이다. 나는 이런 것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적어놓고는 이력서랍시고 낼 뻔했던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지 고민하다가, <크래프톤 웨이>라는 책에서 읽었던 글귀가 떠올랐다.

[우리에겐 노동자 대신 인재가 필요합니다. 노동자와 인재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바로 대체 가능 여부입니다. 노동자는 대체가 가능합니다. 공장에서 사람 하나 빠지면 2~3일 지나 곧바로 다른 인력으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재는 대체 불가능합니다. 그 사람이 하던 일을 다른 사람이 그 수준으로 못 합니다. 인재는 회사가 싫어지면 회사를 나가면 끝입니다. 오히려 회사가 인재를 잃기 싫어 남아주도록 매달려야 하죠.] 이기문, < 크래프톤 웨이> 중에서

크래프톤의 창업자 장병규가 직원들에게 한 말이라고 한다. 노동자가 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인재가 되어달라는 뜻으로 한 말인 것 같다. 학술적인 근거가 있지는 않겠지만, 현장에서 오랫동안 구르면서 얻은 깨달음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이 말에 비추어봤을 때, 나는 나를 그저 노동자로만 여겼던 것 같다. 그러니 이력서에 내가 해온 일들을 기계적으로 늘어놓기만 했던 것이다. 실무자라면 이렇게만 해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로 보나, 연차로 보나 슬슬 관리자 급으로 올라설 때가 되었다. 그러니 이제는 이력서 하나를 쓰더라도, 내가 어떤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먼저 정의하고, 그것을 토대로 내가 해온 일들을 정리해야 한다. 내가 그 일들을 함으로써 어떤 가치를 만들어냈는지, 그럼으로써 내가 몸담은 조직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그리고 고객들에게는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를 이력서에 보기 좋게 담아내야 한다. 내가 어떤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정의할 수 있다면, 내가 어떤 점에서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인재인지도 설명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고민 끝에 이런 스토리를 생각해보았다. 나는 오랫동안 교육을 해왔다. 그 일은 다른 사람의 성장을 돕는 일이다. 작게는 일을 더 잘 하게 돕는 것부터, 크게는 조직의 역량까지 높일 수 있는 일이다. 교육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제품을 어떻게 하면 고객의 상황이나 필요에 맞게 쓸 수 있는지 제안할 수도 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우리 제품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일로 이어진다. 이 연결고리가 탄탄해지면 나는 교육부터 영업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이런 스토리를 이번 이력서에 잘 담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이 스토리를 사실로 만들려면 영업 쪽에서 실적을 더 많이 쌓아야 한다. 다만 이 스토리를 내 커리어의 중심으로 삼는다면, 앞으로 일하다가 흔들릴 때마다 이 스토리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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