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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콘텐츠의 미래>라는 책을 읽고 있다. 두꺼운 책이지만 참고할 만한 내용이 많은 것 같아서 꼼꼼히 읽으려고 하고 있다. 책의 앞부분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걱정하는 이유는 편견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콘텐츠 또는 사건의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전후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보편적으로 올바른 해결책을 찾는 경향이 있다. (p. 31)]

 

솔직히 나는 평소에 이 내용과 반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때가 많다. 이런 저런 사정들 꼼꼼하게 생각하고 결정하기보다는 정해진 쉬운 답 하나를 빨리 찾고 넘어가버리고 싶어 한다. 그러면 더 깊이 생각 안 해도 돼서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답을 정해버리고 나면 꼭 그 답과 어긋나는 케이스를 만난다. 이런 경험이 많이 쌓인 우리 팀장님 한 분은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IT에 정답이 어딨어!' 반쯤 장난처럼 한 말이지만, ‘이쯤 하면 되었다’ 하고 하던 일을 끝내려고 할 때마다 이 말을 곱씹게 된다.

 

영업 일을 하다 보니 고객에게 견적서를 보낼 일이 무척 많다. 나는 처음에는 견적서는 말 그대로 견적이고 서로 협상을 하면서 가격을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견적서를 보내면 고객이 그 견적서에 대해 다시 물어볼 것이라 지레짐작하고는 꼼꼼히 따져보지 않고 일단 고객에게 견적서를 넘겨버리곤 했다. 이것도 빨리 답을 정해서 일을 끝내버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제품 이름, 할인율, 전체 견적 가격 등등에서 실수를 자꾸 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하루에도 견적서를 수십 건씩 보내야 해서 바빴다고 핑계를 대고 싶지만,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고 아찔하다. 이게 다 내가 일을 제대로 안 배워서 그런 것 같다.

 

고객들은 내가 준 견적서를 근거로 삼아, 나름대로의 절차를 거쳐서 우리 제품을 살지 말지 결정했다. 그렇게 보면, 내가 만든 견적서에 우리 회사가 얼마를 벌 수 있을지가 달려 있는 것이었다. 우리 영업팀에서 일을 잘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견적서 하나를 만들 때도 정말 다양한 경우의 수를 이리저리 고민한다. 우리 회사가 얼마나 할인을 해줄 수 있을지, 그러면 우리 회사에는 마진이 얼마나 남는지, 그 고객과 앞으로는 거래를 어떤 식으로 이어갈 수 있을지, 경쟁사에 그 고객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우리 회사가 어떤 조건을 제시해야 할지 등등 다양한 맥락을 꼼꼼하게 따져본다. 그 디테일 하나에 거래가 이루어지는지 아닌지 결정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이런 경우도 있다. 얼마 전에는 한 고객과 미팅을 했다. 이 날 미팅에서 고객이 했던 질문들 중에 몇 가지가 기억에 남는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저희랑 비슷한 기관에서는 이 제품을 어떻게 쓰고 있나요? 그리고 이 제품을 쓰기 위해 데이터는 어떻게 관리하나요?' 말하자면, 자신들이 의사결정할 때 근거로 삼을 만한 사례를 알려달라는 것 같았다. 우리 회사도 이제 업력이 10년이 넘어가다 보니, 고객사 사례는 얼마든지 알려줄 수 있다. 다만 이런 질문을 받으면 고객에게 딱 맞는 답을 주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회사마다 기관마다 상황이나 처지가 다 달라서 제품을 쓰는 방식도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고객의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 나는 몇 가지를 먼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고객에게 물어보았다. 관리하시는 데이터 양은 얼마나 되나요? 데이터가 어느 정도 주기마다 업데이트되나요? 관리자, 경영자, 실무자 등의 여러 직급 중에 어느 직급에서 제품을 가장 많이 쓰게 될까요?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자세한 맥락을 알아야 그에 맞는 답을 찾을 수가 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되는데, 이럴 때 그 말이 딱 들어맞는 것 같다. 자잘한 부분들까지 파고 들수록 그만큼 자신의 상황에 맞게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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