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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 글

종교에 대한 몇 가지 단상

완전한인간지망생 2017. 1. 16. 09:19
<종교에 대한 몇 가지 단상>

1. 도대체 신은 무엇인가?

만물의 생성소멸, 운동, 변화를 주재하는 힘과 의지.(혹은 그 주체)

2. 신의 성질은 무엇인가?

전지전능. 영원성. 무한성

3. 인간은 왜 신을 바라는가?

고통으로부터 구원 바램
상실한 낙원(천국=고통없는 마음 상태)에 대한 본능적 회귀감; '억압된 것의 고차원적 회귀'

4.고통의 원인은?

집착, 탐욕에 동반되는 상실, 결핍감.
(사회구조적 원인은? 그건 결과지 원인이 아님. 인간의 의지-행위-그 집합으로 문화, 제도가 있으므로 근본은 마음에서 찾아야 함.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철저히 인간의 마음을 대상으로 함. 한편, 욕망 일반과 문제가 되는 탐욕은 구별해야 한다. 욕망 그 자체는 '억압에 대한 반작용'인 것과 태생적인 생명의 자연스러운 발현 양자 성격을 공히 가지며 성장 발달 단계에서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욕망 일반이 고통이나 죄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오직 편향되고 집착된 욕망으로서 탐욕이 문제가 된다. 애이불비, 낙이불음)

  그런데, 집착은 '반복된 경험'에 대한 중독의 성격에서 오고 탐욕은 의식 발달이 분리, 경계감을 강화함에 따라 동반되는 존재적 소멸 공포(죽음)를 상상적으로 넘어서려는 데서 온다. (아트만 프로젝트) 반복의 고착, 경계 분리 범위 의식이 곧 자아정체성이다. 고로 요컨대 고통의 뿌리는 '분리된 자아, 자의식, 정체성' 자체에 있다.
 
5. 실락원(에덴 동산)의 실제는 무엇인가?

  경전이나 신화는 인간의 환상과 집단무의식을 상징적, 은유적으로 표현할 때가 많다. 그러므로, 등장하는 모든 상황과 캐릭터를 마음이라는 장의 어떤 풍경임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만 한다. 결코, 사실로 가정하고 보아서는 안된다. 가령, 신적 인간 아담은 성에 대한 구별 의식조차 없던 때의 인간이며 우로보로소적인 깊은 잠에 빠진 인간의 상징이다. 이브의 탄생은 기초 이원 관념의 발생을 상징한다. 그러나 여성을 별도의 성으로 인식함으로써 기초 이원 인식이 발생해서 영원의 잠에서 깨어났지만 아직 본격적인 '정신, 관념' 위주의 인간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심적 고통'의 세계로 나가지는 않았고 에덴에 머물 수 있었다.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묘사는 규범과 금기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며 배타적 타자가 생겼음을, 따라서 상상적 동일시하는 주체, 자아 관념이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이 수준의 의식 발달은 불가피하게 세계와 자신의 유한성과 분리감을 낳고 이 유한성에서 오는 미래쇼크를 과잉, 상상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문명의 발달이 본격화된다. (노동과 출산, 번식의 제도화) 이 과정은 인류사에서 의식과 문명의 발달에 따라 심적 갈등과 고통이 비례적으로 커졌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실락원은 어느 시대, 장소의 구체적 사실이 아니라 인류사의 지적 성장통에 대한 포괄적, 압축적 묘사다. 한편, 이러한 낙원 상실의 과정은 개인의 성장사에서도 프랙탈적으로 반복된다. 일반적으로 영아, 유아, 소년기라는 성장 과정에서 우리는 인류 일반이 역사적으로 겪었던 낙워 상실의 심적 체험을 영원히 반복하고 있다. 그러므로 언어(정신적 관념적) 습득과 개체 자아감형성을 기준으로 ‘에덴으로부터의 추방’을 개인 모두 체험한다고 볼 수 있다.

  일단 심적 고통이 일상화된 세계로 진입하면 실락원에 대한 회귀력도 함께 작동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적으로 금기시되어 있어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으로 침잠하거니와 다른 한편, 금기시 여부와는 상관없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도 하다. 가령, '원억압'이라고도 불리는 출생외상은 자궁으로 복귀를 원하게 하지만 이미 태어난 생명에게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성장 진화한 생명체에게 진화적 퇴행은 미치거나 죽는 길 외에 이를 수 없는 상태다.

  출생을 전후한 존재적 상황을 생각해보면 실낙원의 의미는 좀더 분명해진다. 태아는 대상과 접촉 경험이 없을 뿐, 인간으로서 감각, 지각 능력을 자궁 속에서 모두 갖추었다. 이 때는 구체적 인식 발생 전이므로 시간적으로 영원, 공간적으로 무한의 세계에 있는 셈이다. 더구나 모든 생리적 욕구는 저절로 채워지므로 바램을 느끼는 순간 충족됨의 경험을 통해 일종의 ‘주관적 전능감’ 상태에 있다. 이 상태에서 자궁을 통과하는 물리적 과정은 태아에게 두 가지 근본 욕동을 각인시킨다. 우선 태아는 양수가 빠져나가고 좁은 질을 통과하면서 물리적 쇼크와 극단적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생명의 본능은 이 ‘밀실 공포’적 압박감 앞에서 자연스러운 반작용으로 ‘벗어나고 싶다’는 충동을 가진다.(이것이 최초의 증강본능 내지 초월의지 내지 추상화된 표현으로는 자유에 대한 열망이라는 양적, 타나토스적 의지로 나타난다.) 태아로서는 언제 끝날지 모를 영원과 같은 시간이 지난 후 출생하고 나면, 이번에는 모든 것이 생경하고 모든 것이 끝없이 광활한 ‘광장 공포’ 앞에 노출된다. 낯선 세계로의 내던져짐 앞에서 영아가 가지는 유일한 충동은 원래 자신의 세계, 자궁 속으로 회귀, 합일하고 싶다는 것 외에 달리 있을 수 없다.(이것이 보존본능, 안전 추구 심리, 합일=동일시 추구라는 점에서 추상화되면 사랑과 동정으로 표현되는 의지의 기초다) 모든 태아는 산모가 가지는 출산 고통의 10배 이상의 스트레스 상태를 겪으며 태어난다. 그리고 이 극한 경험 속에서 이미 3가지 보편적인 존재의 ‘초기 조건’이 갖추어진다.(과학에서 초기조건은 운동의 소멸시까지 지속된다. 인간에게라면 이것이 곧 공동 운명이다.) 출산 이전의 ‘지복’과 ‘만물일체감’의 상태, 그리고 타나토스와 에로스 혹은 자유와 사랑 혹은 증강본능과 보존본능 등으로 불리는 이원적 의지. 그러므로 매슬로가 말하는 욕구 발달이 일어나기도 전에 인간은 영원/자유/사랑의 각인 아래 생을 시작한다. 또 영원으로 회귀할 수 없으나 끝없이 그 근원을 기억하고 바라며(물론 의식이나 이성차원은 아니다.) 자유를 추구하면 사랑이, 사랑을 추구하면 자유가 결핍되는 딜레마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것이 근본적 존재 불안을 야기하고 나아가 주관적 전능감이 사회화 성장 과정에서 좌절되고 꺽이면서 그 상실감을 메우기 위한 몸부림으로 온갖 욕구와 욕망의 발달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 무한, 음양 통일로서의 태극 혹은 일자와 합일이라는 일견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의지, 즉 보편종교성은 인간의 숙명적이고 선험적인 조건이라고 보아야 한다.

6. 원죄란?

  이원적 경계 분리 인식의 생성, 발달 그 자체가 갈등과 고통의 뿌리이므로 그것이 원죄임. 바로 그 의미에서 모든 이가 죄인인 것이지 규범적 죄인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이에 대한 처방으로 대표적으로 기독교에서는 자아를 불교에서는 사고를 초월하라고 요구해 왔던 것이다.

7. 구원이란? 구원의 방법은?

  퇴행은 불가능하므로 오로지 탐욕과 개체 자아라는 정체성을 상승 초월하는 길만 가능하다. 진화적 초월은 전 단계의 포기가 아니므로 이성과 개별 주체성에 대한 단적 포기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그것을 포함하면서도 근원적 만물일체감을 회복하는 복합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것이 곧 구원이다. 구원이란 정체성의 궁극적 확장을 통해 자아의 유한성, 폐쇄성에서 오는 불안, 갈등을 인식과 존재 전 차원에서 없애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얻게 되는 궁극적 안심과 평화를 고등종교들은 천국, 극락, 열반이라 표현해왔다.
  기독교에서는 자아를 버리고 절대자에 헌신이라는 원칙을 제시한다. 불교에서는 연기, 무아 세계를 이해해서 탐진치를 버리고 의식이 무경계의 공의 상태에 머물 것을 요구한다. 모두 타당하다. 수용 과정에서 가르침을 편 이를 존재적 타자로 우상 숭배하거나 가르침에 대한 보편적인 왜곡(여전히 자아와 욕구 충족을  전제로 세속화)이 되어서 문제지 그 요구 자체는 보편종교의 일반 원리에 부응한다. 모든 종교에는 영성을 내면화한 상태에 이르기 위한 나름의 수행 체계들이 전해져 왔다. 기도, 명상, 참선 등.

8. 종교와 시대정신의 관계는?

  종교가 규제적 이념의 추동력이라면 시대정신은 그 현실태로서 문화, 문명적 현단계의 과제 의식이다. 종교가 이정표라면 시대정신은 당대의 표준이다. 그러므로 종교를 당대의 과제와 분리하는 모든 논리는 사회 체제의 필요에 의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정교 분리나 종교/과학, 창조론/진화론의 허구적 대립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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