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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터널(2016)

완전한인간지망생 2016. 9. 16. 00:38
'한국형 재난 영화'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재난 영화면 재난 영화지 왜 굳이 한국형이라고 특별히 범주를 설정한 것일까. 생각해보면 '한국형 재난 영화'라고 불리는 영화들에는 어떤 공통점들이 있다. 재난 영화에 등장하는 재난의 종류는 다양하다. 부실공사, 전기 합선, 방화, 수해, 전염병, 심지어 괴물의 출현 등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모든 소재들이 사용된다. 그럼에도 이들이 '한국형 재난 영화'라고 하나의 범주에 엮일 수 있는 이유는 부정하게 뒷배 봐주기, 재난 방지 대책의 부재, 제대로 작동되지 않은 매뉴얼, 사적 이익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사람들, 무능하면서 실적만 챙기려는 행정 기관의 모습 등과 같이 사고가 터질 때마다 우리를 갑갑하게 만드는 우리 사회의 단면이 고스란히 반영되기 때문이다. 영화 <터널>에서 터널이 무너진 원인은 부실공사이다. 심지어 터널의 구조는 설계도면과 완전 딴판이다. 누군가 부당하게 이득을 취하기 위해 공사에 필요한 자재를 빼돌리는 일은 현실에서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한국형 재난 영화'의 또 다른 공통점은 일관되게 개인과 무능하고 비인간적인 시스템을 대비시킨다는 점이다. 시스템의 온갖 문제들이 집약되어서 재난이 발생하지만, 그 모든 피해와 책임은 고스란히 개인이 져야 한다. 여기서의 개인은, 사고로 인해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사람과 사고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으로 나뉜다. <터널> 또한 그러하다. 보통 피해자는 사고의 원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자동차 판매 대리점 매니저와 터널 붕괴 사고의 연관관계를 찾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사고는 정말 우연하게 일어났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억울한데, 구조의 손길이 닿을 때까지 본인의 힘만으로 버텨내야 한다. 피해자는 시스템을 신뢰하지 않지만, 그가 처한 상황에서 기댈 곳이라고는 구조대밖에 없다. 너무나 뻔하게도(!) 구조 시스템은 엉망이지만, 그 안에도 본분에 충실하려는 사람이 하나쯤은 있다. 온갖 사람들이 방해하지만, 그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덕분에 피해자를 겨우 구해낼 수 있었다. 더 답답한 것은 사건 이후의 트라우마까지도 개인이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심리 치료를 통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다면, 평생 터널을 지날 때마다 그는 벌벌 떨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살아남은 피해자가 다시 터널 속으로 들어갈 때 잔뜩 긴장하는 장면이 그래서 가장 슬펐다. 

이런 류의 영화들이 흥행에 꽤나 성공할 수 있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일 터이다. 몇날 몇일씩 뉴스 전면을 장식하는 사고는 드물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반복해서 일어난다.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온갖 처방들이 사후약방문 격으로 다양하게 제기되지만, 그것도 그때뿐이다.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기에 재난이 계속해서 발생할 뿐더러, 그에 대한 대처 또한 나아지지 않는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특히나 <터널>을 보면서는 세월호가 떠올랐다.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국가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국가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묻게 될 정도이다. 영화와 현실이 다른 점이 있다면, 국가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묻는 국민들을 상대로 굉장히 강력한 권위를 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래도 사람은 살아야 한다. 적어도 억울하게 생을 마감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생각을 좀 해봤는데, 가르치는 일을 해서인지, 결국 사람이 지닌 가능성에 희망을 품게 된다. 잘 살펴보면 시스템을 구성하고 운영하는 기초 단위는 결국 사람이다. 관료제의 폐해는 사회과학의 해묵은 논쟁거리이기에 감히 여기서 몇 마디로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다. 그저 원론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어떤 것보다, 특히 물질적 이익보다 사람을 우선시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고,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다시 신뢰하게 될 때, 개인과 시스템은 비로소 화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원론적인 언설만큼 무책임한 것이 없다. 깃털만큼의 무게도 없는 저 문장에 현실적 의미를 조금이나마 더하려면, 내 일상에서나마 최선을 다해 실천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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