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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봄날은 간다>

완전한인간지망생 2016. 10. 16. 03:53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 서로에게 들이는 시간만큼 관계가 깊어진다. 너무나 통속적인 모습이지만, 그들에게는 특별한 설렘으로 사랑이 시작된다. 희대의 명대사, "라면 먹을래요?" 우물쭈물하며 쉽게 가까워지지 않는 두 사람의 거리는 이 한 마디로 제로에 수렴해버린다. 만물이 소생하는 어느 봄날, 두 사람의 사랑도 시작된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색이 있다. 두 개의 색이 합쳐져 어떤 조화를 이루느냐에 따라 관계의 친절함이 달라진다. 다행히 두 사람은 멋진 색을 조합해낸 것 같다. 언제라도 함께하고 싶고, 쉴 새 없이 서로를 탐닉하고 싶어 한다. 이렇게 두 사람은 사이 좋게 속도 맞춰 한 발 한 발 관계를 진전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랑의 걸림돌은 뜬금없이 나타난다. "사귀는 사람 있으면 데리고 오래, 아부지가."



이미 결혼에 한 번 실패한 쓰라린 기억을 가지고 있던 은수(이영애 역)는 그 말에 화들짝 겁을 집어 먹은 것 같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 보고 놀라는 법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갑작스럽게 마음을 짓누르고, 관계가 거추장스럽기만 한 것으로 여겨진다. 모진 말을 주고 받던 두 사람은 결국 서로에게 이별을 고한다. 상대의 변심을 납득하지 못한 상우는 여전히 궁금하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마음의 관성이란 참으로 무섭다. 계속해서 그 사람에게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행복했던 때로는 두 번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 두 사람 다 그 시절의 자신에서 너무 멀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내 안에 상대의 그림자가 얼마나 짙게 드리워져 있었는지 발견하는 시간이다. 상우는 그 시절의 우리를 찾아 지금의 은수에게 가려는 발걸음을 계속해서 되돌려야 한다. 돌아오지 않는 할아버지를 평생 동안 기다리는 할머니에게 상우가 하는 말은 사실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다. "이제 정신 좀 차리세요!"



시간은 흘러 이윽고 다음 봄이 왔다. 은수는 종이에 베인 손을 지혈하려다 문득 상우가 떠오른다. 사랑이 습관이 되어 몸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용기내어 상우를 찾아갔지만, 상우는 이제 은수가 두렵다. 같이 있자는 제안은 가장 아픈 상처를 되새기는 말이 되어버렸다. 상우는 은수를 거절하고, 은수는 돌아선다. 이번에도 상우는 그 자리에 서 있고, 은수는 자신의 길을 간다. 과연 두 사람은 이제 서로를 완전히 떠나보낼 수 있게 되었을까. 



삶이 깊어질수록 누군가를 쉽게 욕할 수 없다. 두 사람이 품을 수 있는 사랑의 크기가 달랐고, 지닌 색이 달랐고, 걷는 속도가 달랐다.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다. 하지만 여전이 의문이 남는다. "이게 최선입니까?"



아름다운 소리와 한 장면에 집착하지 않는 간결한 편집이 어우러져 멋진 영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이토록 마음 깊은 곳을 울리는 건, 단순히 영상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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