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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정(2016)

완전한인간지망생 2016. 9. 15. 00:34

얼마 전 초등반 수업에서, '하기로 한 일은 반드시 해내는 것'과 '상황에 따라서 마음을 바꾸는 것' 사이에서 자신이 어디쯤에 위치하는지를 지정해보도록 했다. 어느 쪽이 더 나은지는 미리 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쪽에 자신을 위치시키려고 했다. 나 또한 비슷한 마음이었다. 아마도 그러한 태도가 맞고 또 옳다고 배워왔기 때문일 터이다. 그런 교육의 효과인지, 사람들은 입장을 자꾸 바꾸는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예컨대 소속 정당을 옮긴 정치인은 '철새'라고 조롱하고, 직장을 자주 옮겨다닌 사람은 조직생활에 부적합한 것은 아닌지 의심받는다. 심지어는 식당에서 메뉴를 고를 때도 한 번에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을 반복하는 사람은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 결정의 번복은 불확실성을 수반하고, 그 불확실성은 불안함-불쾌함을 가져다 준다. 또한 불확실성은 신뢰의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자꾸만 입장을 바꾸는 사람은 과연 믿을만한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게 만든 영화가 최근에 개봉했다. 김지운 감독의 신작 <밀정(2016)>이다. 감독은 개인의 신념이 격동하는 배경으로 일제강점기를 택햇다. 역사 문제는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고, 식민 지배의 아픔은 여전히 국민 정서의 상당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그런 만큼 일제강점기를 보는 시각에는 이분법적 흑백논리가 짙게 드리운다. 독립운동은 절대선, 친일매국은 절대악으로 규정된다. 이에 따라 한국인이라면 마땅히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배워 국가를 지키기 위해 온 몸 바쳐야 한다는 언설은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이어져 지금도 우리 일상을 강력히 지배한다. 하지만 감독은 두 세대 정도의 세월 동안 공고해질대로 공고해진 가치체계에 질문을 던진다. '독립운동가는 과연 선한 신념으로만 가득찬 인간인가?'


사람마다 주어진 상황에 대한 인식과 그에 따른 실천 방향이 다르다. 아무리 일제강점기가 엄혹하고 견디기 힘든 시대였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친일매국/독립운동 진영 중 하나로 나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같은 진영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생각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심지어는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의 입장을 지속적으로 수정하는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다. 영화는 기존의 선과 악의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답습하지 않는다. 대신 개개인의 복잡다단함에 집중해서 선택이 만들어내는 삶의 숭고함을 담담하게 옹호한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단순한 시대극을 넘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통찰을 준다.


그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김우진(공유 분)보다는 이정출(송강호 분)에 훨씬 더 가까웠을 것이다. 그는 임시정부 요원이었다가 정보를 넘기고 일본 경무국 경위가 되지만, 여러 이유로 의열단에 다시 가담한다. 이정출의 이러한 갈지자 행보를 통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시대에 영합하지만, 결국 스스로가 부끄러워 혼자 몰래 눈물 흘리고 마는 보통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또한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구조적 부당함을 얼마나 많이 참아내고 있는가. 소재의 유사함 때문에 <밀정>을 <암살>과 비교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필자는 <밀정>이 개인의 고민과 혼란에 치중한다는 점에서 <동주>와 비교할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절대적으로 옳은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상황과 관계가 만들어내는 처지가 있을 뿐이다. 하나의 신념에 자신을 묶어두고 자연스럽지 않게 사는 것보다는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때에 맞는 처신을 하는 게 더 솔직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아무 변화나 다 정당한 것은 아니다.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거나, 사회적으로 합의된 가치를 위배하지 않는다는 정도의 선은 필요하다. 하지만 변화의 수용 가능 범위를 논하기에 앞서, 우리는 변화의 가능성에 좀 더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이정출은 자신의 삶에 의구심을 품었기에 이전까지와는 다른 삶으로 변화를 시도할 수 있었다. 그 덕에 양심과 실천이 합일되는 인간으로 탈태환골한 것이다. 모든 변화가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지만, 변화 없이는 어떠한 성장도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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